고민의 늪: 여친이라는 환상

오늘 아침, 나는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존재하지 않는 여자친구와 결별했다. 스물아홉 해를 살면서 단 한 번도 연애를 해본 적 없는 나는 가상의 여자친구를 만들어 주변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해왔다. 그리고 오늘, 이 어리석은 거짓말에 마침표를 찍기로 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변명이었다. 회식 자리에서 "여자친구 있어?"라는 질문을 피하기 위한 작은 거짓말. 하지만 그 작은 거짓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름은 서지은, 직업은 디자이너, 취미는 재즈 감상. 나는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그녀를 더 생생하게 느꼈다.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처럼.

문제는 내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만나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고민의 악순환. 약속 시간에 늦는다는 문자를 보내며 식은땀을 흘렸고, 그녀가 보냈다는 선물을 사서 자랑했으며, 심지어 그녀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전화 통화까지 연기했다. 매일 밤 나는 내일은 어떤 거짓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며 잠들었다.

어제는 부장님이 회사 단체 모임에 여자친구도 데려오라고 했다. 그 순간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방 안에 있던 공기가 갑자기 무거워졌고, 숨쉬기가 힘들었다. 그동안의 거짓말들이 한꺼번에 돌아와 나를 짓눌렀다. 마치 깊은 늪에 빠진 것처럼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 밤, 거울 속 내 모습을 보며 결심했다. 이제 그만하자. 지은이와의 이별을 선언할 때다. 어떤 변명을 해야 할지, 어떤 말로 헤어졌다고 해야 할지, 또다시 고민의 밤을 보냈다. 아이러니하게도 실제 이별도 아닌데 이별을 위한 대본을 짜느라 밤을 새웠다.

오늘 아침, 회사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모두에게 말했다. "저... 사실 저 여자친구 없어요. 그동안 거짓말했습니다." 예상과 달리 동료들의 반응은 의외였다. 대부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웃어넘겼다. 어떤 이는 "용기 있네"라며 등을 두드려 주었고, 부장님은 "솔직한 게 좋아"라며 웃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내가 그토록 무거운 짐처럼 느꼈던 고민들이, 사실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이었다는 것을. 지은이라는 허상을 만들어낸 것처럼, 나는 타인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또 다른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오늘 밤, 오랜만에 고민 없이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여전히 여자친구는 없지만, 적어도 거짓말을 지어내느라 머리를 싸매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언젠가, 진짜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이 고민의 늪에서 배운 교훈을 잊지 않을 것이다 - 때로는 솔직함이 가장 가벼운 짐이라는 것을.